자동차산업의 흐름을 바꾼 사건 연대기

Post date: Oct 20, 2011 10:18:04 AM

출처 : 채영석의 자동차 세상 | 2011.10.18 09:51

 

내연기관 엔진을 사용한 자동차가 등장한지 125년이 지났다. 인류의 역사로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자동차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단축, 그로 인한 인류 문명의 발전은 실로 엄청나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등장 자체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후 세계 경제의 발전은 자동차와 밀접한 관련이 맺으며 진전하고 있다. 경제의 핵인 금융과 결탁하며 그 도는 더 해 갔다. 금융은 자동차산업 발전에 특효약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극약이 되어 자동차산업 자체의 판도를 바꾸어 버렸다. 자동차산업의 흐름을 바꾼 사건들을 연대 별로 정리해 본다.

글 / 채영석 (글로벌오토뉴스국장)

1886년- 내연기관 자동차의 등장

내연기관 자동차는 독일의 고트리프 다임러와 칼 벤츠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들은 각각 4륜과 3륜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탈 것’을 발명해 인류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은 살아 생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자동차회사를 설립했는데 이들의 사후인 1926년에 다임러 벤츠라는 회사로 합병되었다. 그 회사에서 생산하는 자동차가 메르세데스 벤츠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이제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닌, 더 강한 힘을 가진 스스로 움직이는 수송 기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단지 가게 하는 것(making the thing to go)만이 아닌 더 잘 가게 만드는 것(making it go well)을 생각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그 형태는 대부분 당시의 마차의 부품을 사용한, 어느 모로 보더라도 마차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없는 마차」의 형태였다.

1894년-세계 최초의 모터스포츠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한 것은 독일이지만 그것을 상품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프랑스다. 그 첫 번째가 도시간을 달리는 파리 루앙간 레이스였다. 당시는 가솔린차는 물론 증기차, 인력차, 유압차, 전기자동차 등 다양한 형태의 자동차들이 참가했다. 드 디옹 백작의 증기차가 가장 먼저 들어왔으나 규칙위반으로 실격 처리됐고 다임러 기관을 탑재한 푸주와 파날 르와소르차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자동차의 대중화는 모터스포츠(Motor Sports)와 함께 이뤄졌는데, 오늘날 그랑 프리(Grand Prix)의 원조인 최초의 서킷 레이스도 프랑스의 르망에서 1906년에 열렸다. 1907년의 북경과 파리 랠리와 1908년의 뉴욕과 파리간의 2만 마일 자동차 경주가 연이어 열리는 등 자동차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자동차는 돈과 의지력과 그 자동차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온갖 문제에 도전할 수 있는 육체적인 지구력을 가진 소수 열성파들의 장난감(toy)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가정 및 직장에서 빠르고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으로 바뀌었다.

1908년-대량생산 모델의 등장

경제적이며 빠른 운송 기구로서의 의미를 갖는 자동차로 정착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900년에서 1909년 사이는 대량 생산을 통한 대중화와 함께 자동차는 그 형태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기본 골격을 갖는 시점이었다. 즉, 차체의 프레임은 목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차대(chassis)의 견고성이 필요하여 금속으로 바뀌었고, 눈비,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앞뒤 좌석을 덮개로 씌운 자동차(closed car)가 나오면서 지붕과 창문으로 감싼 실내에서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생산이나 기술적인 발전에서 계속 선두를 달렸다. 예를 들면 드 디옹(De Dion) 같은 자동차공장은 한 달에 평균 200대 이상의 차량을 제작하여 도로를 점령해 나갔고, 독일의 다임러나 벤츠는 고성능 자동차들을 만들어 영국이나 남부 프랑스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에서 다른 차들을 맥없이 만들면서 자동차경주라는 새로운 장을 예고했다.

영국에서는 영국 일주 경주 대회(Thousand mile trial)가 열려 비로써 자동차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동차의 대중화에 앞장선 나라는 역시 미국으로서, 올즈모빌(Olds Mobile)이 1901년에 자동차의 대량 생산을 최초로 시도했지만 ‘대중의 차’를 만들려는 헨리 포드(Ford)의 야심에 밀려나 1908년에 Ford의 디트로이트 공장에서 ‘포드 모델 T(Moder T)`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여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포드 못지 않게 자동차산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GM이었다. 1923년부터 1958년까지 무려 35년 동안 GM을 이끈 알프레도 슬론 2세의 ‘모든 지갑과 목적에 맞는 차’를 생산한다는 전략이 그것이다. 저가 모델 시보레부터 시작해 폰티악, 올즈모빌, 뷰익, 캐딜락 등 수입에 따라, 성격에 따라 자동차를 고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GM은 1920년대 말 포드를 제치고 최대 자동차업체로 올라섰다.

1921년-할부금융의 시작

포드자동차의 T형 포드가 대량 생산으로 자동차의 제조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었다면 중산층들도 쉽게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할부 금융이다. 1921년 미국에서 시작된 할부금융은 이 후 수 차례 바뀐 경제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를 촉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1933년-독일 아우토반 등장

독일의 아우토반이 자동차 산업에 미치는 역할은 지대하다. 193년 착공되어 1938년에 완공된 아우토반의 당시 총 연장 길이는 3,680km. 지금은 13,000km 가량으로 확대되어 있다. 속도 무제한이라는 도로의 등장으로 독일의 자동차는 기술 우선의 고성능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차의 득세,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 이후 일본차의 득세 등으로 양적인 열세에 놓였던 독일차가 성능을 바탕으로 프리미엄의 길을 걸어 성공하게 한 요인이다.

1945년-2차 세계 대전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GM은 미국 최대의 자동차업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매출액 기준으로 미국 최대 기업이 되었다. GM은 미국 내 공장을 통해서는 연합군에게, 1929년 인수한 독일의 오펠을 통해서는 독일군에게 군용차를 공급해 돈을 벌었다. 그런 혁혁한 성과를 등에 업고 GM 의 CEO는 국방장관으로 영전되기도 했다. 이 때 등장한 말이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이다. GM의 CEO를 역임한 후 1953년 미국 국방장관에 임명된 찰리 윌슨이 자신의 임명을 위한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이로 인해 경제를 바라 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1950년대의 GM처럼 규모도 크고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는 기업이라면 그 기업의 성패와 운명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수많은 납품업체, 그 납품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들, 그 기업에서 일하는 수십만명에 달하는 고용인들이 구매할 상품의 생산 업체 등 거대 기업 하나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끝이 없다. 그래서 거대 기업의 경영 성적이 국민 경제 번영에 특히 중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 논리는 지금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1953년-신용카드의 등장

할부 금융보다 더 크게 일반인들의 소비를 촉진시킨 것은 신용카드다.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의견이 있지만 현재와 같은 신용카드가 등장한 것은 1951년 미국 뉴욕에서 프랭크 맥나마라 등이 설립한 '다이너스 클럽'의 카드로 보고 있다. 다이너스 카드는 구매 물품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단일 목적의 카드를 확대하여 가맹점을 통한 신용 거래를 가능하게 하고 대금결제를 대신해 주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으며, 연 18%의 이자와 별도의 수수료가 부과되었다. 1958년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카드 발급을 개시했다. 은행 발행카드로는 최초로 1951년 뉴욕의 '플랭클린 내셔널' 은행이 카드를 발급했다. 이어 1959년 '아메리카'은행이 다목적 카드인 뱅크아메리 카드로 카드시장에 진출 함으로써 본격적인 대중 신용카드 시대가 열렸다.

1973/1978-석유파동

1973년 OPEC는 이스라엘, 시리아,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끝난 원유유출금지를 강요했다. 원유가는 세배로 뛰었고 미국은 경기후퇴상황에 빠졌다. 가솔린의 부족은 작고 연료효율이 좋은 자동차들이 각광을 받게 했다. 1979년 대공황 이래 미국 최악의 경기후퇴를 초래했던 두 번째 원유유출 금지로 이란 혁명이 촉발되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자동차산업의 중심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석유의 매장량과는 관계없이 석유업자들의 공급량 농간이 시작된 사건이었지만 이 후 자동차산업은 그 모양세가 달라졌다. 정작 석유 매장량이 많은 미국은 ‘석유 고갈론’ 등에 크게 게의치 않았다. 하지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일본의 자동차회사들은 기름 덜 먹는 자동차의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소형 저가차로 시장을 공략했다. 그로 인해 1980년 일본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 지위에 오르게 된다.

동시에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현지화 전략을 서둘러 미국 등 전 세계에 생산 시설을 건설해 나갔다. 아이러니하게 그로 인해 1993년 미국의 자동차생산량이 일본을 다시 앞지르게 된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일본차로 인한 것이었다.

1989년-일본 럭셔리 브랜드의 등장

1986년 혼다 아큐라, 1989년 토요타 렉서스와 닛산의 인피니티 등 일본 자동차 빅3의 미국시장 전용 브랜드가 출시되었다. 배경은 미국시장에서 일본차를 재 값 받고 팔자는 것이었다. 1959년 미국시장에 처음 수출된 일본차는 초기 조악한 품질과 잦은 고장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품질 최우선의 차만들기를 실시해 일본차는 1980년에는 미국차를 앞질렀다. 그러자 유럽과 미국은 일본에 통상압력을 가했다. 일본 메이커는 이에 대해 현지 생산이라는 전략으로 맞섰다. 판매되는 곳에서 생산한다는 말은 그때 나온 것이다.

동시에 수출 자율규제라는 것을 시행했다. 한 해에 일정 대수 이상 수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저가 소형차에서 중고가 중대형차에 대한 비중을 높여갔다. 그럼에도 판매가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내 놓은 것이 바로 아큐라와 렉서스, 인피니티 등 미국시장 전용 럭셔리 브랜드다.

미국시장에서의 성공을 배경으로 렉서스는 현재 70여개국으로 진출했고 인피니티는 30여개국, 아큐라는 10여개국으로 그 폭을 넓혀 가고 있다. 이들 럭셔리 브랜드는 일본차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92년-Clean Air Act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선포한 이 법은 자동차산업에 환경이라는 단어를 부각시킨 결정적인 사건이다. 1998년부터 캘리포니아주에서 완전무공해차 2%를 판매하지 않으면 자동차 판매를 전면 금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자동차회사들의 현실적인 한계(?)로 2008년 8%의 완전무공해차의 판매로 연기되었고 그 역시 2012년 3%로 후퇴한 상황이다. 정부가 아무리 강력하게 주도를 해도 기술적인 한계,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실현을 위한 투자가 지나치다는 자동차회사들의 반대에 부딛히면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 에어 액트’는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1998년-다임러 크라이슬러 합병

1998년 독일 다임러 벤츠와 미국 크라이슬러의 합병 뉴스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극비리에진행되어 전격적으로 발표된 두 회사의 합병 내용은 메가톤급이었다.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가 1998년 합병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폭 넓은 잠재력을 바탕으로 그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 합병은 독일의 고급자동차 기술과 재빠르게 몸집을 줄인 미국 경영진의 결합이었고, 대서양을 사이에 둔 전설적인 두 자동차 브랜드, 다임러 벤츠의 매끈한 메르세데스 세단과 당시로서는 높은 인기 속에 수익성이 높은 크라이슬러의 지프 디비전의 SUV와 닷지 디비전의 픽업이 한 팀을 이룬 것으로 누구나 좋은 평가를 내렸었다.

그리고 비용을 절감하여 다임러크라이슬러 AG를 일본과 독일, 그리고 미국의 자동차회사들 간의 혹독한 경쟁을 견디어 이겨낼 수 있는 거대 자동차 회사로 만들고자 하는 저변에는 규모의 경제의 논리가 있었다.

하지만 2007년 두 회사는 문화적인 갭을 좁히지 못하고 결별하고 말았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2007년 5월 14일(현지 시간) 미국 크라이슬러 그룹의 80.1% 및 크라이슬러 관련 금융서비스회사를 55억 유로(74억 1,000만 달러)에 미국 투자회사(국내에서는 사모펀드라고 하고 있다.) 서베러스(Cerberus) 캐피탈 매니지먼트(CBS.UL)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1998년-현대기아 합병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합병도 세계 자동차 역사에 한 장을 장식한 내용이었다. 합병과 제휴의 목적은 물론 규모의 경제 확보다. 90년대 중반부터 세계 자동차업계에는 연간 400만대 이상 생산하는 메이커만 살아남는다는 논리가 지배해왔다. 규모의 경제의 요체는 물론 ‘코스트 다운(Cost Down)’이다. 그래서 당시 세계의 자동차업계에는 격심한 M&A 물결이 일었다.

규모의 경제 논리가 단순히 연간 400만대 이상 생산이라는 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기본적인 논리를 거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각 메이커들은 이합집산을 한 것이다.

현대와 기아자동차도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던 상황에서 합병을 통해 일정 수준의 규모를 이루었고 이제는 세계의 자동차시장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하며 확대일로에 있다. 합병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던 메이커들이 그들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세계시장에서 빅5 자동차 업체들 만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세계 자동차 업계 빅5에 진입하기 위하여 연간 생산량 500만대 수준의 생산라인을 갖추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또한 기아자동차를 외국계 업체가 인수할 경우 현대로서는 국내 시장에서 조차 점유율을 지키기 어려운 입장이었다는 분석은 이미 여러 차례 알려진 내용이다. 여기에 국민 정서상 “국민의 기업”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기아자동차를 외국계 기업에 넘기는 것이 정부로서는 부담이었던 점도 작용해 두 회사는 합병의 길을 걷게 됐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합병을 통해 우선 연구개발센터를 통합해 연구개발과정에서 많은 비용저감 효과를 보았고 플랫폼 공유화를 통해 생산과정에서 비용을 크게 저감했다. 그 힘으로 현대기아차그룹의 남양연구소는 1만여명에 달하는 연구인력을 보유하며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루어냈다. 여기에 이라크전쟁으로 시작된 석유 위기는 연비가 좋은 저 배기량차의 수요를 촉발시켜 세계 시장에서 현대와 기아자동차가 만든 모델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2003년-미국의 이라크 침공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의 석유회사에게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려 주었지만 반대로 디트로이트 빅3는 침몰하게 하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가솔린가격의 폭등과 소비자 무력증의 소위 “CNN 효과” 등 두 가지 단기적 현상이 예상되지만 심각한 손상은 야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보다는 중동에서의 장기간 혼란으로 인한 불경기가 훨씬 심각할 것으로 예측했다. 전쟁의 위협이 있을 때 이미 가솔린 가격은 배럴당 23달러에서 30달러를 넘었다. 물량부족보다는 공급체계 붕괴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지지부진함으로 인해 당초 예상대로 미국의 경기는 하락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이라크 전쟁 발발 당시 J.D.파워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41%가 가솔린 가격이 그렇게 높이 인상되면 같은 자동차보다 약간 작고 연료효율이 높은 자동차를 살 것을 고려할 것이라고 답했었다. 34%는 더 작은 차를, 23%는 하이브리드 파워 트레인을 적용한 자동차를 고려할 것이라고 답했다.

일부에서는 설사 가솔린 가격이 폭등을 해도 이 조사에 의하면 운전자들은 그들의 운전습관을 바꾸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결론짓기도 했었다. 소비자들은 어떤 가격일지라도 대중교통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 풀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반면 중대한 오일쇼크가 진행되면 소비자들은 SUV를 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에 대해 당시 오일업계 전문가들은 그 정도로 중대한 충격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들 모두는 틀렸다. 흔히 하는 ‘전문가’들은 항상 그들이 필요한 전망만 내놓는다.

부시의 이라크침공은 미국의 석유재벌들에게는 포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미국 자동차산업을 무너트린 결정적인 계기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그로 인해 현대기아차의 급부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007년-중국 할부금융 개시

1921년 미국에서 할부금융이 시작되어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 도입을 극대화했다. 자동차산업의 규모화를 촉진시킨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2007년 88월부터 실시된 중국의 할부금융 역시 궤를 같이 한다. 이로 인해 중국의 자동차 시장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뛰어 넘는 성장을 하게 됐다. 2005년 중국시장의 자동차 판매는 연간 564만대였다. 2006년에는 그보다 160만대 증가한 719만대, 2007년에는 170만대 증가한 893만대에 이르며 폭발했다. 하지만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로 48만대 증가한 938만대에 머물렀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2009년 중국시장 자동차 판매를 1,000만대 전후로 예측했다. 결과는 전혀 달랐다. 430만대 가량이 증가한 1,364만대였다. 다시 ‘전문가’들은 2010년에는 1,500만대의 전망을 내놓았지만 이 역시 잘못된 것이었다. 2010년 중국의 자동차 판매 예상치는 1,750만대에 달하고 있다. 할부금융의 실시에 더해 신용카드의 발급 증가도 소비의 증가에 한 몫을 했다. 2005년 1,300만개에 불과했던 신용카드 발급수가 2009년 말에는 1억 8,500만개(중국의 통계는 아직까지는 확실치 않지만) 달했다. 더불어 경제발전의 3대 축인 투자, 소비, 저축 중 소비에 비중을 두도록 한 중국 정부의 정책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수출만으로는 경기를 살릴 수 없다는 당국의 의지가 자동차 수요를 끌어 올리고 있다.

2009년- 미국 GM과 크라이슬러의 파산

1908헨리 포드에 의한 대량생산 시스템의 도입, 1920년대 GM의 자동차산업 마케팅 전략의 도입, 2차 세계 대전을 통한 엄청난 수입, 1960년대까지 세계 자동차산업을 주도했던 디트로이트 빅3가 결국은 철퇴를 맞았다. ‘자유경쟁’을 표방하는 미국에서도 ‘국익’을 내 세우며 ‘구제금융’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회생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은 그들이 주장하는데로 자유경제 체제하의 자본주의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걸핏하면 수퍼 301조 등을 내 세우며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막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GM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경제 탓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1979년부터 2009년 파산보호신청을 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흑자를 내 본 적이 없는 기업이 GM이다. GM은 자동차쪽에서보다는 GMAC라고 하는 금융회사를 통해 돈을 벌었다. GMAC는 자동차 구매에 따른 금융업무라는 고유 업무 범위를 넘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금융 거래를 통해 수익을 올렸다. 2004년에는 GM 수익의 80%가 GMAC에서 나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GM은 제조업으로서의 본질을 망각하고 자동차산업을 금융산업화해 버린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기 보다는 다른 브랜드의 인수를 통해 제품 개발을 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자동차산업은 뉴 모델로 먹고 산다.’는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GM은 기술 개발을 통해 매력적인 신차를 내놓기보다는 ‘돈 놓고 돈 먹기’에 치중했다. 뿐만 아니라 파산 보호 신청을 한 책임을 지고 물러 나는 CEO 겸 회장의 퇴직금으로 2,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는 모럴 헤저드라는 미국 대기업병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크라이슬러는 다임러와의 결별 이 후 많은 인적 자원이 회사를 떠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해결을 위해 피아트로부터 자금 수혈을 받기로 했다. 나아가 피아트 내에 알파로메오와 란치아 브랜드등의 모델에 크라이슬러 로고를 부착해 판매하려는 고육지책을 구사하고 있다. 짚과 닷지 등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009년-토요타 대규모 리콜

2009년은 GM과 크라이슬러 파산보호신청과 토요타의 리콜로 인한 격동의 해였다. 토요타의 리콜이 언론 지면을 장식하면서 GM과 크라이슬러의 파산은 상대적으로 묻힌 느낌이었다. 토요타의 리콜 사태가 수면 위로 부상하자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미디어들은 앞 다투어 토요타의 문제점 지적에 나섰다. 받아 쓰기의 전형을 보여 준 결과였다.

토요타자동차는 2006년과 2007년에 걸쳐서도 960만건의 리콜을 했었다. 당시에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그런 리콜을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행위 정도로 다루었다. 그것이 2009년에는 달랐다. 마치 처음 있는 일처럼 떠들어댔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토요타는 뭇매를 맞았다. 이는 자동차산업이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내용이었다. 경제의 국경이 없다는 말이 수사였음을 보여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2009년 리콜 사태의 부상으로 1,000만대 시대를 향해 질주하던 토요타의 행보에 제동이 걸렸고 그로 인해 자동차산업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규모의 경제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이 옳았느냐 하는 것부터 부품 아웃 소싱으로 인한 문제점 등이 거론되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일반 미디어들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GM 등 디트로이트 빅3의 침몰과 토요타자동차의 타격은 글로벌자동차산업의 세력 판도를 새롭게 짜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부터 ‘살아 남을’ 자동차회사의 리스트에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던 현대기아자동차가 이제는 폭스바겐, 토요타와 함께 양산 브랜드의 3대 축을 형성하고 있다. 석유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한 현대기아차의 성장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